Love Corps Nova Scotia

 

 

   

   

천국백성의 심령을 품고, 말하고, 행하는  천국의 사람들 선교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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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of heavenly hearts, heavenly words, and heavenly actions   The Heavenly People Ministry  

 

  천국백성이니  천국백성의 마음을 품고, 천국백성답게 말하고, 천국백성답게 행하는...

          

 

 

 

 

윌리암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님

 

웹 선교 기념관

 

 

 

 

 

 

 

 

 

 

 

 

 

  웹 선교 기념관을 시작하며...

 

 

     윌리암 존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07.15 출생하여 1895.06.22 한국에서 순교) 선교사님은 이곳 케이프 브레튼 섬(Cape Breton Island)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한 후에 맥켄지 선교사님은 한국 초대 선교사로 소래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맥켄지 선교사님은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한국인들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생활하며 선교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심한 열병을 얻게 되었고, 점점 심해지는 열병으로 인해 정신착란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맥켄지 선교사님은 고통에 시달리다 다음의 유언을 남기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순교하셨습니다.

 

"저의 의복과 남은 돈 172달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교회 부근에 묻어 주십시오"

 

     초대 선교사님들이 뿌린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고, 다시 복음의 꽃씨들이 된 우리들이 어쩌다 복음이 말라버린 이곳 캐나다 땅으로 복음을 들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 덕분에 영생을 얻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전해 주신 영생의 복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순교로 보여주신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소박하지만 웹 기념관을 준비하였습니다. 

 

 

 

 

 

 

 

 

 

 

  맥켄지 선교사의 삶  "한눈에 보기"

 

 

 

 

1861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출생.

 

 

 

 

 

다른 이들보다 조숙했던 맥켄지는 13세에 이미 성인처럼 보였고, 당시 시골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과목을 이수함.

 

 

 

 

 

14세 노바스코샤 주에서 허가하는 준교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19세가 될 때까지 근처 하우스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

 

 

 

1880

 

노바스코샤 주에 있는 픽토우 아카데미에서 YMCA 활동.

 

 

 

 

 

 

[한편,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理)에 한국최초 자생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상륜 형제에 의해 자생적으로 세워졌다.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는 평안도 의주 출신으로,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1848∼1926)이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겪게 되었을 때 선교부 병원에서 헌터(J.M. Hunter) 의사의 치료로 열병을 고치게 되었다. 매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 도움으로 열병에서 구출된 서상륜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로스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 작업을 하게 되었다.

     1882년 로스선교사는 서상륜과 의주청년들의 도움으로 최초의 우리말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를 출간했다. 한편, 그 해 10월 서상륜은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권서인이 되어 한글번역 성경을 가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고려문 별정소에서 금지된 성경을 불법으로 가져오다가 모두 빼앗기고 고향 친구 도움으로 간신히 10여권만 가지고 고향 의주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관헌에 적발되어 전도에 어려움을 느끼자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인 소래로 옮겨와 복음을 전했다. 신자들이 생기자 1883년 5월 작은 초가집을 마련하여 예배당으로 삼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최초의 자생적인 소래교회가 탄생했다.

 

   

 

1888  

맥켄지는 달하우지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신학을 공부.

   

 

   

이 후 핼리팩스에 있는 신학교 선교회에서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작정.

   

 

   

이 후 래브라도어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

   

 

1891  

핼리팩스로 돌아와 신학 공부를 마치고, 신학사학위를 취득.

   

 

   

같은 해 봄, 고향 케이프 브레튼 섬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소명을 기다림.

   

 

   

한국이 그 어느 곳보다 선교가 필요한 곳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가장 순종하는 것은 한국 선교를 가는 것이라 결심.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한국 파송을 요청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거부됨.

   

 

1893.12

 

독립선교사의 신분으로 제물포항을 통하여 입국.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재정적 어려웠던 맥켄지 선교사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할 것을 계획.

   

 

   

45km를 걸어 서울에 도착. 다른 선교사들 무리에 합류.

   

 

   

 

1894.1

 

‘홀’선교사(캐나다 출신, 미국 감리교 소속 선교사, 의사)과 함께 평양을 향하여 이동.

   

 

   

이동 중 강도를 만나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복음을 전함.

   

 

   

홀 선교사로부터 우선 중요한 한국어를 배움

( “빨리 빨리”, “불 좀 피워주세요”, “밥 두 그릇만 주세요”, “국 좀 주세요” 등...)

   

 

   

구멍 뚫린 종이 문에 바닥은 멍석이 깔린 전형적인 한국식 흙 초가집에서 잠을 자고, 또 선교계획을 세우며 계속 이동.

   

 

   

맥켄지 선교사는 평양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기도하고 의논한 후, 평양에서 남쪽에 위치한 소래 마을에서 사역할 것을 결정.

   

 

   

평양에서 다시 소래 마을까지 몇 칠 동안 걸어서 이동.

   

 

1894.2.3

 

소래에 도착.

   

 

   

서경조씨가 맥켄지 선교사를 소래 마을에서 맞이하고, 유리 창문이 있는 좋은 집을 맥켄지 선교사에게 제공함.

   

 

1894.2.5

 

서경조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 15명이 모임. 멕켄지 선교사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비유로 심판의 날을 설교.

   

 

1894.2.6

 

맥켄지 선교사가 캐나다에 있는 ‘바빗’ 형제에게 쓴 편지 :

   

 

   

     조선에 온 지 약 한 달 반 동안 480km 이상을 걸었습니다.

     지금 나는 솜씨 있게 짠 조선식 카펫인 ‘명석’ 위에 앉아 있습니다. 방바닥과 벽은 흙으로 그리고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에 발라 붙인 한 개의 유리 조각을 통하여 햇빛이 들어와서 참 다행입니다.

     내가 먹는 음식이 무엇이냐구요? ... 끼니마다 쌀을 먹습니다. 여기서 쌀은 래브라도어로 치면 생선과 같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러니까 스물 한 끼를 똑같은 음식만 줄곧 먹는다면 누구나 싫증을 낼 겁니다.

     선교사들이 여행할 때 여기서 통용되는 한 가지 관례는 그들이 먹은 고기가 무슨 고기인지 묻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례는 언젠가 어떤 선교사가 여행 중에 그가 먹은 고기가 개고기였다는 것을 안 후부터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곳 조선 사람들에게는 개고기가 희귀한 음식이며, 명절에만 먹는 진귀한 음식입니다.

     내가 묵고 있는 집주인은 친절하게도 나에게 조선식 양말인 ‘버선’ 한 컬레를 주었습니다. 실내에서 신기에 참 편합니다... 버선은 상당히 따뜻할 뿐만 아니라 솜 사이에 발을 끼우기 때문에 푹신해서 좋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담배를 배우고 있습니다... 담배를 못 피우는 사람은 여기 올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거의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웁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해변에 산보를 갔습니다. 중국과 조선을 갈라놓는다는 황해 바다의 물결이 내 발 밑에서 철썩거리고 3km 정도 깔려 있는 아름다운 백사장, 거기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조개껍질들이 깔려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고향에 온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모든 것이 참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적어도 이 바다만은 지금의 나의 심정을 이해하겠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딱딱한 목침, 고르지 못한 흙으로 된 방바닥 등 한국인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불평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되는 것’으로 여김.

   

 

1894.3

 

마을 굿판, 잔치 등에서 주민들과 친분을 맺으며 수시로 복음을 전함.

   

 

   

편지를 보내기 위해 6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

   

 

   

서울에 도착하여 남쪽에서 폭동(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됨. 알렌과 미국 공관은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들에게 집안에 머무를 것을 통보함.

   

 

1894.5.10

 

평양의 홀 선교사가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급한 전갈을 보내옴. 내용은 평양의 포졸들이 홀 선교사의 교인들을 투옥시킨다는 것.

   

 

   

홀 선교사를 돕기 위해 맥켄지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인력거를 타고 4일 만에 평양에 도착.

   

 

   

포졸들로부터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이라는 교서를 받았다”라는 말을 들음.

   

 

   

잡혀간 기독교인들은 감방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함.

   

 

   

선교사들, 영국 총영사(당시 캐나다 시민은 영연방 소속이었음), 미국 공사 등의 도움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석방 됨.

   

 

1894.6.1

 

맥켄지 선교사는 배편으로 평양를 출발하여, 6월 3일 제물포에 도착.

   

 

   

도착하여 제물포 앞바다에 프랑스, 중국, 일본의 전함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함. 전쟁을 예감하며 서울로 이동.

   

 

   

6월 말경 제물포에서 더 많은 일본 전함들이 정박해 있는 것을 확인.

   

 

   

잠시 제물포에 머물면서 영국과 미국 전함에 승선해 있는 영국과 미국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함.

   

 

1894.7.23

 

서울의 궁궐이 일본인들에게 장악 되고, 사실상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것을 알게 됨.

   

 

   

아펜젤러 선교사가 Korean Repository에 기록한 당시 상황 :

   

 

   

     그날(1896년 7월 23일), 일본 군인들이 서울에 도착한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은 날이었다.

     농부들은 쌀, 보리, 콩, 과일 등으로 새벽 장을 보고 있었다.

     노예, 종, 평민 할 것 없이 필요한 물건들을 위해 시장으로 가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이 궁중을 향애 진군해 가는 것을 보자, 조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추측할 수 있었다.

     전쟁을 알리는 포성과 함께 장안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고갔다.

     궁중에서 허겁지겁 도망치는 양반고관들의 모습이 보기에 참으로 민망했다.

     평상시에는 자신들이 평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서민들과 상종도 않던 그들이, 갑자기 천민들의 지게를 빼앗아 자신들이 지게를 지고 마치 자기가 천민인양 위장을 하고 도망치는 모습이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우리 일행이 서대문 부근에 이르렀을 때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거기서 피난민들의 행령이 계속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여인들이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머리에 인 보따리를 잡고 피난을 떠났다. 그 뒤에는 무거운 짐을 등에 맨 남편들이 뒤를 따랐다.

     
   

 

1894.10

 

맥켄지 선교사는 다시 소래에 도착. 주민들이 맥켄지 선교사를 성대한 환영해 줌.

   

 

   

일본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던 주민들은 더욱 맥켄지 선교사 주변으로 모임.

   

 

   

맥켄지 선교사는 일본 공사에 청원서를 보내며 억울한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함.

   

 

   

(당시 한국 정서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억울하게 쫓겨난 며느리, 여자 아이, 남자 아이들, 첩으로 있다가 쫓겨난 기생까지도 맥켄지 선교사 주변으로 모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맥켄지 선교사를 의지하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

(“호랑이가 나타나면 맥켄지 선교사가 나가 볼 꺼야”라고 말할 정도로 맥켄지 선교사를 의지함.)

   

 

   

서양 식생활을 완전히 금하고, 주민들과 똑같이 생활할 것을 결심.

   

 

   

매일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함.

   

 

   

기독교를 비판하는 동학군을 맥켄지 선교사가 잘못 됐다고 말함. 이로 동학군들의 표적이 됨.

   

 

   

동학군은 100만 명으로 늘어남. 남부에서 일어난 동학은 서울 및 다른 도시들까지 점점 확대 됨. 동학군들은 관군들을 패배시킬 때마다 장총으로 무장하게 됨.

   

 

   

한편,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함.

   

 

   

이 무렵, 맥켄지 선교사가 기포드 선교사에게 쓴 편지 :

 

     나는 내 마음속에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되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불행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암담한 미래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조선 사람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발견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1894.11.25

 

한 때 맥켄지의 한국어 선생이었다가 동학군이 된 사람이 맥켄지 선교사에게 와서, “당신의 생명이 위험하니 이곳을 떠나십시오. 특히 타지역에서 온 무법한 동학군들이 위험합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예수회 신부 한 사람들 불태워 죽였습니다”라고 말함. 맥켄지 선교사는 “나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이곳 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함.

   

 

   

맥켄지 선교사를 소래를 떠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동학군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동학군들의 마음속에 심어 줌.

   

 

   

한편, 서경조는 동학군의 지도자가 된 옛 친구를 몰래 만나 성경과 함께 계속해서 복음을 전함.

   

 

   

맥켄지 선교사와 소래 교인들은 다친 동학군들, 생명이 위급한 동학군들을 도와주고 치료해 줌.

   

 

   

조금씩 동학군들도 예배에 참석.

   

 

   

교회 건축을 위해 2~3명의 동학군이 300량, 한 동학군의 아내가 50량, 동학군의 지휘관이 500량의 건축헌금을 드림.

   

 

   

일본의 핍박이 심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맥켄지 선교사 곁으로 모임. 섬에 사는 어느 어부는 맥켄지 선교사 옆으로 이사를 오기도 함.

   

 

   

멕켄지와 서경조는 예배당 건축과 함께 학교 설립을 계획. 서경조가 교사 1년 분의 봉급으로 쌀 열 가마와 옷 한 벌을 책임지기로 함.

   

 

1895.2.26

 

조그만 방에서 김세학당(김세는 맥켄지의 한국 이름 / 한국최초 남녀공학 / 후에 해서제일학교로 발전)이 시작됨. 성경 말씀, 기독교 신앙, 언문 등을 공부함.

   

 

   

당시 문화에서 여자아이들은 남자들 앞에서 말을 할 수 없었으나, 김세학당에서는 여자 아이들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또 대표로 기도를 인도함.

   

 

1895.6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건축. (그 다음해에 출석교인이 20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다시 8칸을 증축하여 모두 16칸의 기와집으로 만듦. 후에 서상륜은 서울 새문안교회가 세워지면서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 소래교회는 동생 서경조가 맡음.)

   

 

1895.6

 

맥켄지 선교사에게 심한 열병이 생김. 열병으로 정신착란이 옴.

   

 

 

- 다음은 맥켄지 선교사의 마지막 일기 -

( 몸이 아파서 날짜를 하루씩 잘못 계산함 )

1895.6

 

 

17일(실제16일)

 

상쾌한 날씨, 오전 예배에는 97명이 참석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오후에는 교회 학교에서 소년들과 만났다. 약간의 열이 있었으나 예배에 참석했다.

   

 

18일(실제17)

 

핼리팩스 달하우지대학의 YMCA가 선교비로 50달러를 보내주었다. 몸이 아파 키니에 15알을 복용하였다.

   

 

19일(실제18)

 

하루 종일 열이 떠나지 않았으나 학교에 나가서 아이들이 일주일 동안 배운 것을 외우는 것을 들었다.

나는 방문객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을 잠갔다.

   

 

20일(실제19)

 

싸늘한 밤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았다. 병마에 지지 않고 계속 버티어 이기리라고 결심했다.

   

 

23일(실제22)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은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내 마음은 평안하며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같은 날,

 

- 닥터 애비슨(Oliver R. Avison)에게 쓴 편지 -

     
   

에비슨 박사님, 일주일 전에 저는 60리 정도 떨어진 장연읍에서 타는 듯한 폭양 밑에서 2일간이나 걸어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룻밤은 흰 한복을 입고 한기를 느낄 때까지 밖에 앉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일주일 전부터 체온이 오르고 입맛을 잃고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더운 물을 가지고 땀도 내고 두꺼운 옷을 입어도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돕기 위하여 박사님이나 다른 분이 올 수 있겠는지요?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사님이 할 수 있으면 부디 친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6월 23일

W. J. Mckenzie

 

이 편지를 발송하지 못한채 숨짐. (이 편지는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됨)

   

 

     

같은 날,

 

- 어머니에게 쓴 편지 -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머니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1895.6.22

 

맥켄지 선교사 순교

   

 

   

 

   

 

   

- 후에, 주민들이 캐나다장로교 총회 선교부에 보낸 편지 -

   

 

우리는 맥켄지 목사님의 친구요 동역자이며 형제이신 여러분께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고 또 기도 어린 관심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멕켄지 목사님이 한국에 오신 후 그분은 황해도 장연의 소래 마을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소래 마을은 언제나 아주 사악한 곳으로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캐나다에 계신 우리의 형제들께서 기독교인 선생님 한 분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895년 12월 26일

주님의 이름으로

소래에 있는 기독교인들 올림

   

 

   

 

   

- 복음에 대한 간절함 -

( 한 소래 교회 노인이 캐나다에 쓴 편지 내용 중에 담긴 "복음에 대한 간절함" )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서

이 편지가 그곳에 닿으면

외국인의 눈을 뜨게 하여

이 나라의 절실한 요청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주시기를....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과 소래 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간절함이 캐나다 교회 내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킴.

 

     캐나다 장로교 총회는 1897년 한국 선교를 의결하고, 1898년 9월 8일에 푸트(W. P. Foote) 목사, 매크레(D. M. Mcrae) 목사, 그리어슨(R. G. Grierson) 박사 등 세 사람을 시작으로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함. 그 후 캐나다 선교사들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함께 조선의 해방을 위해 힘썼을 뿐만 아니라, 세브란스 병원(미국 클리블랜드 출신의 부자가 헌금했지만, 사실 캐나다 선교사 에비슨에 의해 1904년에 세워짐등 수많은 선교적 업적을 한국에 세움.

 

 

 

 

 

 

 

 

맥켄지 선교사의 생가 (케이프 브레튼)

맥켄지 선교사의 친필 사인

 

 

 

 

맥켄지 선교사가 소래에서 머물렀던 집

소래 교회

 

 

 

서경조(우), 아들 광호(좌), 아들 병호(아래)

김세(멕켄지의 한국 이름) 학당

 

   

맥켄지 선교사의 마지막 일기

맥켄지 선교사 무덤

 

 

 

 

 

 

 

 

 

  맥켄지 선교사에 관한 동영상

 

 

윌리엄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에 관한  

 

영상물 보기 

 

 

 

 

 

 

 

 

 

  책, "케이프 브레튼에서 소래까지" PDF 파일을 다운로드

 

 

[ 다운로드 ]

- 제작자인 유영식 교수의 동의를 얻어 PDF 파일 공유합니다 -

 

글쓴이 : 엘리자베스 맥켈리

 

노바스코샤 주의 트루로에서 출생

트루로 사범학교와 뉴욕 선교학교 수학

1909년 한국에 선교사로 원산과 함흥에서 활동

동생 루이스(Louise McCully)는 1909년에 한국에 온 캐나다 최초 여성 선교사

 

옮긴이 : 유영식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동양학부 교수

 

[ 저서 ]

Earlier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A Study in History, 1888-1895.

"The Impact of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 A Historical Survey of Early Canadian Mission Work, 1888-1897." Ph. D. dissertation.

 

[ 편집 ]

Canada and Korea : Perspectives 2000  

 

[ 역서 ]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 윌리엄 존 매켄지의 생애

Canada and Korea

Putting 'C' in Corea : The Canadians Who Went to Korea

캐나다 한인 이민사

게일(James Scarth Gate)생애와 그의 선교사업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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